혁명의 길
The way of Buddha 9부
과거 부산과 함양에서 재가자의 신분으로 법을 폈던 백봉거사라는 이는 불법(佛法) 수행을 하는 재가자들 사이에서 꽤 알려진 이다. 그 분은 생전에 가끔 그 제자들에게 “서울 하늘 봤나?” 라고 묻곤 했다고 한다. 질문을 받은 이가 별 생각 없이 봤다고 하면 다시 “부산 하늘 봤나?” 라고 물었다. 어느 정도 불법 공부를 한 이들이라면 이쯤에서 그렇게 묻는 스승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렇다. 하늘에는 금을 그을 수 없다. 서울 하늘도 부산 하늘도 우리가 편리하게 갖다 붙인 이름이지 어디까지가 서울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부산 하늘이겠는가. 한데 우리가 세상에 그어놓은 온갖 금은 사실 서울 하늘과 부산 하늘 사이에 그어놓은 금과도 같다. 그리고 그 금은 철의 장막, 마지노 선, 휴전선만큼이나 담이 높고, 대단히 경계가 삼엄한 금성 철벽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낯선 이들을 만날 때 상투적으로 묻는 것 중의 하나가 고향이 어디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향 사람이면 반가워서 얼싸안고 자기가 싫어하는 고장 출신이면 그쯤 해서 대충 선을 긋고 대할 채비를 한다. 나는 그게 지겨워서 한 동안 누가 고향이 어디냐 물으면 <우주>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 무주시군요,” 하더라.
그런데 사실, 내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다. 내 고향은 우주다. 족보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설 늘어놓듯이 하자면 내 물리적 고향은 우주 은하계 내의 태양계, 지구별 아시아 주 한국이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바로 우주 그 자체라서 내게 고향을 자꾸 따져 물으면 난처해진다.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진실을 접고 거짓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도에 그어놓은 행정구역선들이 진짜 국토에 새빨갛게 분명히 그어졌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물론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한 구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사람들은 그 상상력도 꽤나 웃겼다. 최초의 우주인인 가가린은 유인우주선을 타고 대기권을 벗어난 뒤 점잖게 한 마디 한다는 게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신은 없더라,” 였다. 그는 물론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람답게 신이니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들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한 방 먹일 셈으로 농담을 한 것이긴 했겠지만 그 말은 두고두고 웃겼다. 바로 저 자신이야말로 제가 사방을 둘러보며 찾았다는 바로 그것인데.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 개신교 골수 신자들이라면 이런 말에 놀라서 펄쩍 뛸 것이다. “이런 불경스러운 작자 같으니! 그럼 우리 각자가 <신>이란 말이냐?”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잔뜩 받아 기독교가 힘을 많이 잃은 지금까지도 God(야훼)이라는 말을 대단히 좋아하고 그런 것을 떠받들기 좋아하지만 사실 그것It 혹은 마음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 중국인들은 성리학을 주장해놓고 금방 잊어버렸지만 조선 사대부들은 몇 백년간 그것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들었다. 우리나라 개신교도들도 조선 사대부들의 그런 전통에 어긋나지 않게 서양인들의 다수가 이미 등져버린 기독교 신을 여전히 엄청 떠받들기 좋아한다.
하지만 존귀하다면 더없이 존귀한 그것It에 <신>이라는 그런 싸구려 이름이 당키나 하겠나. 눈 밝은 이들이 본다면 <신>은 당집에서나 어울리는 이름일 수도 있다. 알고 보면 유서 깊은 샤먼의 전통을 이어받은 당집도 꽤나 괜찮은 데다. 까놓고 얘기해서 정체불명의 서양 귀신 모시기 좋아하는 으리으리한 개신교 성전들보다 훨씬 더 괜찮은 데일 수 있다. 신실한 진짜 기독교인들은 내가 여기에서 얘기하는 서양귀신이 예수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해주리라(요한복음)"고 했을 때의 진리(참다운 실체, 본성으로서의 진리)가 아님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한국의 일부 원리주의 개신교도들이 떠받드는 신은 암만 봐도 그들이 겉으로만 매도해마지 않는 척 하는 바알 신 혹은 월가Wall street의 귀신을 많이 닮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은 건 사실은 8부 후반에서 언급했던 <지식>에 관해 좀더 부연해서 말하기 위해서다. 지식 혹은 지적인 앎은 앞에서 말한 온갖 금 긋기, 범주화의 소산이다. 세상사람들은 도무지 금을 그을 수 없는 하늘에다 대고 금 긋기를,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수많은 그물망처럼 복잡다단하게 그어대기 좋아한다. 이런 식의 금 긋기를 크게 부추긴 것은 근래 과학혁명 이래 눈부시게 발전한 온갖 과학이론들일 것이다. 과학이라는 것이 원래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기 좋아하고 분석할 수 없는 것을 분석하기 좋아하고 범주화할 수 없는 것들을 범주화하고자 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이 그러기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다루기 힘든 복잡한 것들을 좀 단순화해서 따져보고 생각해보자는 의도에서, 따지기 힘든 것은 금을 그어서 제외하자는 뜻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실증적으로 다룰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을 물자체라고 해서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치부하고 과학적 인식의 영역에서 제외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천만 아니다. 과학은 한정된 영역에서 대단히 편리하고 유용한 학문이다. 과학은 한정된 영역과 시점에서는 대단히 정밀한 개연성을 가졌기 때문에 누구나 다 인정하다시피 지금 이 시대의 물질문명은 거의 전적으로 과학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기술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 삶은 보이고 들리는 것,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 과학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것, 곧 물질계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다음에 나는 물질계를 넘어선 기운의 세계, 영적인 세계에 관해 하나의 글(The way of Buddha11)을 쓸 작정인데, 아무튼 우리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지식 혹은 알음알이가 결정적으로 해로운 것은 그것이 우리의 마음 혹은 근본영성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스스로가 허공에 무수히 그어놓은 금들이 근본영성 혹은 근본 지혜가 훤히 드러나 스스로의 앞길을 밝게 비춰주는 것을 방해한다.
지식은 우선 그 얄팍한 금 긋기 혹은 갖가지 규정을 통해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 장미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 꽃에 장미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학명을 붙여서 학문적으로 범주화하고, 그것은 빨갛거나 하얗거나 분홍색을 띠고, 가시가 있고, 오뉴월에 피고, 관상용으로 쓰거나 향수재료로 쓰거나 더러 식용으로 하기도 한다는 등등으로 규정한다.
장미를 이렇게 규정하고 나면 그것으로 장미에 관해서 다 이야기한 것일까? 그런 식의 규정은 장미가 지닌 그 이외의 이해 가능성들을 모조리 박탈해버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런 정도의 이해를 갖고서 장미를 다 이해했다고 넘어가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장미를 봐도 그런 지식의 범주에서만 볼 가능성이 있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미에 관해서 뭐라고 하건 그런 것들은 다 장미의 이름에 불과할 뿐 장미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런 설명들은 지도에 해당할 뿐 지형 그 자체가 아니다. 당신이 지도만 들여다보고는 내가 노르웨이에 갔고 세네갈에 갔다고 하면 사람들은 웃고 만다. 너는 네 방에서 지도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하고. 차라리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장미를 대할 때 우리는 장미에 관한 얄팍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보다 장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규정하기 어려운 것들을 규정한 내용으로 넘쳐난다. 우리는 그 정도만 안 것을 갖고서 다 알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정한 이해가 아니다. 이성적 사유방식은 태생적으로 결정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뇌의 전두엽만을 활용하는 방식의 인식과 이해는 우리가 원초적으로 타고난 다른 인식 능력들을 사장시켜버릴 우려가 있다.
우리에게는 측두엽을 통한 이해, 감성 혹은 가슴을 통한 이해방식도 있다. 가슴이 열린 사람들은 이성적 사유만 하는 이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세계와 접속할 수 있다. 이성적 사유만 하는 사이코패스들은 미처 알지 못하는 공감, 연민과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감성적 세계보다 더 깊은 영성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는 꿈도 꾸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지식 혹은 알음알이를 전염병처럼 고약하게 취급하고 이 법은 불립문자(문자 또는 생각으로는 다가갈 수 없다)라고 딱 못을 박아버리곤 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식은 마음을 드러내거나 보지 못하게 방해하니까.
우리는 흔히 불경을 크게 보아 반야부와 보현부의 둘로 나눈다. 반야부는 바로 깨달음에 들어가게 하는 단계를 설한 부분이고 보현부는 자각을 이룬 뒤 법을 펴면서 세상 돕는 단계를 설한 부분이다. 그리고 반야부에 속하는 대표적인 경전들 중의 하나가 바로 금강경이다. 이런 경전들은 우리가 단단한 실체라 믿는 온갖 것들을 부숴버리는 데 집중한다. 집과 산과 강 같은 것들은 물론이요 온갖 앎의 내용, 규정, 정의, 이데올로기, 신조, 강령 따위를.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고 들리고 생각나는 모든 현상은
모두가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다.
만약 모든 현상이 현상이 아닌 줄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는 것이다.”
― 금강경
바로 이런 단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이야말로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는 온갖 것들을 산산이 부숴버릴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 같은 진실이기 때문이다(The way of Buddha 2부 참조).
진짜 눈을 뜨고 볼 때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겉만 화려할 뿐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공꽃, 환화공신(幻華空身), 토끼뿔, 거북털 같은 것들이다. "없긴 뭘 없어? 내 눈에는 빤히 보이는데?" 라고 말하지 말라. 제 고유의 아이덴티티가 없는 물거품이나 구름 같은 것들이라는 뜻이니까. 구름은 수시로 형상을 바꾸기 때문에 우리는 장미 모양의 구름을, 아파트 모양의 구름을 현시점에서의 모양에 따라 장미나 아파트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해도, 그것들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이 순간에도 제 고유의 아이덴티티가 없는 허상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가짜 실체들에 속아서 울고 웃고 득의만면해하고 허탈해하고 좌절하곤 한다. 붓다는 그러니 눈을 뜨고 바로 보라, 고 말한다. 반야심경은 아주 짧은 경전이지만 사람들이 심심할 때 염불하듯 읊어대기 좋은 가벼운 내용이 아니라 반야부의 핵심이 다 농축되어 있는 정수중의 정수인 경전이다. 이것이 말하는 메시지 역시 금강경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지식이 없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고 염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지식이 실재를 그려놓은 지도에 불과하고 실재 자체가 아님을 확연히 안다면 지식은 오히려 현실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 그런데 지식이 전부라고 알면 평생 그 속박과 억압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지식을 자유자재하게 활용하는 이가 되어야지 지식에 속박된 노예가 된다면 뭐에 쓰겠는가. 그래서 붓다는 세상의 모든 이론과 지식, 견해 같은 것들을 일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야기한 모든 법문은
뗏목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법(法)이라 하더라도 버려야 마땅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 금강경
붓다는 마음을 밝히게 하기 위해 자신이 이야기한 모든 내용조차도 신주단지처럼 모셔야 할 철벽의 이데올로기나 불변하는 진리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강을 건너게 하기 위한 뗏목 같은 것이라 했다. 마음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좋은 이야기들조차도 시기와 상황에 맞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데 이 세상에 횡횡하는 온갖 주장, 신조, 이데올로기, 이론, 지식 따위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느냐는 뜻이다.
그런데 가끔 강을 건넌 뒤에도 그 무거운 뗏목을 지고 가는 이들이 적지 않아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곤 한다. 지고만 가나? 행여 잃어버릴새라 머리에도 이고, 목에도 걸고, 허리에도 두르고, 위 아래 주머니에도 잔뜩 틀어넣고, 발목에도 걸고 질질 끌고 가지 않나. 불필요하게 많은 돈과 호화저택과 좋은 차 등을 비롯한 물질적 재산에 대한 집착, 권력에 대한 집착, 혈연에 대한 과도한 집착, 지역이나 학연 등과 같은 허구적인 인연에 대한 집착, 온갖 고정관념, 퀴즈 쇼에 나가서나 써먹을 수 있을 뿐 그밖에는 별 쓸모도 없는 온갖 잡다한 지식, 괜시리 고집하는 이념이나 신조, 우상화된 신앙, 허구에 불과한 각종 이데올로기들을.
그러니 사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무겁고 힘겹겠는가? 너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불필요하게 많은 것도 문제다. 상황과 시기에 맞는 꼭 필요한 것들만 갖고서 홀가분하게 가면 몸도 마음도 훨씬 더 가볍고 좋을 텐데.
ⓒ무주공산&사회적네트워크&2011년 6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