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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흙덩이를 쫓아가고 사자는 주인을 문다
조회 1,023  |  추천 5  |  비추천 0  |  점수 20  |  2011-06-09 17:11
글쓴이 :   무주공산

혁명의 길
The way of Buddha 8부

   

"들음의 성품은
소리를 따라 나지도 않고,
소리를 따라 멸(滅)하지도 않는다.
이 들음의 성품을 깨달으면
소리의 티끌에 끄달리지 않는다.
그러니 참 들음은 생멸이 없고,
참 들음은 오고감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 무주(無住)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는 앞 선 글에서 나는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게 아니라 마음이 보고 마음이 듣는다”고 했다. 한데 도대체 뭘 일러서 <마음>이라고 하는가?

과거에 불법(佛法. 내가 불교라 하지 않고 불법이라고 하는 이유는 내가 불교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붓다가 설한 진리의 길을 알고 실천하는 데 관심이 있지 기성종교 혹은 종교적 도그머로서의 불교에는 별 관심이 없다)을 설하는 이들의 법문을 들을 때나 그에 관한 책을 읽으면 <마음>이라는 말이 자주 나왔는데, 나로서는 이 마음이란 말이 정확히 뭘 뜻하는 말인지 도무지 알기 어려워 여간 갑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뭐냐고 물으면 친절하게 대답해주지도 않았다.

나는 마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과 발음이 비슷한 mind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mind는 정신을 뜻하는 말이라 아무래도 맞는 말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이나 감정을 뜻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고. 그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어떤 때는 그게 본래의 자기를 뜻하는 참 성품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생각이나 감정을 뜻하는 말 같기도 했다. 거기에 영혼이라는 말도 있고, 영성이라는 말도 있고 불성이라는 말도 있으니. . .

세상의 학교는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교사들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물으면 대개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그러면 우리의 의문은 금방 해소된다. 그런데 불법과 관계된 이들은 도대체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심타리 고약한 어떤 구루는 마음이 뭐냐고 물으면,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또 어떤 구루는 느닷없이 주먹을 불쑥 내밀거나 엄지를 불쑥 치켜들거나 악, 하고 고함을 지른다. 아주 친절하고 자상해서 노파선을 한다는 악평을 듣는 어떤 구루는 “바로 너다,”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옛날 옛적에 더없이 심타리 고약했던 임제 선사라면 씨름선수도 아니면서 질문자를 대번에 번쩍 들어 뜰에 메다꽂았을 것이다. <조주록>에 나오는 오대산의 노파라면, “똑바로 가라니까 또 그렇게 가네,” 라고 퉁박을 줬을 것이다. (오대산의 이 찻집 노파는 눈이 꽤 밝은 이로 오대산을 찾아가는 스님들에게 자주 그렇게 골탕을 먹였다. 똑바로 가라고 해서 스님들이 곧장 앞으로 가면 "또 저렇게 가네," 라고 하면서. 노파는 세상의 수행자들이 제대로 간다고 믿고 가는 게 잘못 가는 것임을 이렇게 꼬집은 셈이다)  

아니, 모르는 걸 좀 가르쳐달라는데 이 늙은이들은 어째서 이렇게 하나같이 고약하고 사납게 군 것일까? 모르는 게 뭐 죈가?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에서 우리가 모르는 걸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감내해야 한다고 했다. 지적 탐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수치심 같은 건 좀 접어둬야 한다는 그의 말은 옳다. 그렇지만 중국의 옛 선사들은 사람 무안 주고 상처주기를 밥 먹듯이 하는 불친절한 사람들 같다. 그래서 예전에 내게 가르침을 준 어떤 구루는 요즘 사람들에게 옛날 임제 선사가 했던 식으로 했다간 제대로 맛이 들기도 전에 죄다 도망가 버릴 거라고 개탄했다.

그 말은 옳다. 요즘의 젊은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어릴 적에 고생을 별로 하지 않고 성장해서 상처받기 쉽고, 상냥한 말, 친절한 대접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같다. 롯데 백화점 같은 데 가서 쭉쭉빵빵한 미녀들이 일렬로 도열해서 “이럇사이 마세,”의 한국판 버전 같은 걸 외치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경향이. 사실 그런 말은 늘씬한 고무 인형들이 들려주는 ARS 음성 녹음 소리에 불과한데. 

그런 반면, 항간에는 욕쟁이 할머니라고 하는 이들이 여럿 있는 것 같고, 또 그런 할머니들을 좋아하는 고객들도 꽤 많은 것 같다. 그런 할머니가 손님에게 “빨리 처먹고 나가”라고 하는 것은 사실 욕이 아니라 애정 어린 말일 수가 있다. 겉의 말투만 거칠지 사실은 따듯한 속마음에서 나온 말. 그런 의미에서 옛 선사들도 사실은 대단히 상냥하고 친절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마음이 뭐냐>는 질문의 또 다른 변주라 할 수 있는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뭡니까?” 라는 제자의 물음에 대해 “그건 이렇구 저렇구....” 하고 세세하게 가르쳐주면 그게 제자를 올바르게 대접해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마른 똥막대기니라,” 라고 답하는 게 더 올바른 응접이 아닐까?

결론부터 미리 말한다면, 불가에서 말하는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여겨 애써 찾으려 든다면 헛고생으로 끝난다. 붓다가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경전의 하나인 저 유명한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구게가 나온다.

“만약 모습에 의해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에 의해서 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사스러운 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라
결코 여래(如來)를 볼 수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여래가 바로 그것It 이요, 온갖 선사들이 마르고 닳도록 외쳐온 부처(영성)요, 우리의 본래마음이요, 참다운 나요, 물리적인 우주까지를 넘어서는 온 우주다. 그래서 우리가 지성적이라면 곧 우주가 지성적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여래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눈으로 보려고 제아무리 애를 써도 볼 수 없고, 느낌으로 찾으려 제아무리 애를 써도 느낄 수 없다. 다른 글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그것은 제 눈으로는 제 눈을 볼 수 없고 칼로는 칼을 썰 수 없고 제 손가락으로는 제 손가락을 만질 수 없는 이치와도 같다. 다만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작용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눈과 귀와 뇌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뇌는 연두부 같은 핑크빛 물질 덩어리에 불과해서 인연이 다하면 공기처럼 흩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눈동자나 고막처럼 마음이 작용하는 물질적인 회로 구실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글에서 말했다시피 먼 곳에서 연기가 나면 그곳에 불이 났다는 걸 알아야 하고 아름다운 꽃을 보면 그 밑에 뿌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본래 마음이라니? 마음에 본래 마음이 있고 본래 아닌 마음이 따로 있단 말인가?

그렇다. 불가에서 흔히 쓰는 마음이라는 말은 대개가 본래마음을 뜻하며, 본래아닌 마음은 바로 마음이 인연에 따라 자연스럽게 작용해서 일어나고 구르는 생각과 감정 같은 식심(識心) 혹은 심의식(心意識)을 뜻한다. 본래 마음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없는 듯하면서도 있는 현묘한 것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마음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도 때리고 “마음이 없습니까,” 라고 물어도 때렸다. “그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입니까,”라고 하면 짜증스럽게 “아니라니까,” 라고 하면서 또 때렸다. 제자가 이판사판이다 싶어서 마지막으로, “그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 라고 하면 “요, 미꾸라지 같이 빤들빤들한 놈,”이라고 해서 더 세게 얻어맞았다. 저 유명한 포대화상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마음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
시방세계에서 으뜸가는 영물인데
또 다시 자재하고 묘한 작용을 구하니,
가련하구나.
이 모두가 한 마음의 진실만 못한 것을...”

맨 위에서 인용한 무주선사의 “소리를 따라 나지도 않고 소리를 따라 멸하지도 않는” 들음의 성품도 곧 마음을 뜻한다. 대체로 우리는 소리를 들으면 소리만 쫓아가지 들음의 주체, 혹은 들음을 가능케 해주는 본성품, 곧 <마음>에 관해서는 거의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만 쫓아가고, 감정이 일어나면 감정만 쫓아갈 뿐 그 바탕이 되는 마음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소리나 생각, 감정 같은 것들은 인연(조건) 따라 일어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금방 사라지는 빈 것이요 덧없는 것들인데 우리는 노상 그런 것들만 갖고 씨름하고, 시비를 가리려 들고, 논란을 벌이곤 한다. 심지어는 뒷모습이 제 아내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살인까지도 불사한다. 

그래서 중국 남송의 고봉 원묘 선사는 그런 이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선요(禪要)라는 책에서 “한로축괴 사자교인(漢盧逐塊 獅子咬人)”이라는 말을 했다. “흙덩이를 던지면 멍청한 개는 흙덩이를 쫓아가지만 영리한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문다,” 는 뜻이다. 여기서 한로는 한나라의 사냥개를 이르는 말이다. 고봉선사의 말마따나 우리 대다수는 한로처럼 흙덩이만 쫓아갈 뿐 사자처럼 직방으로 마음을 겨냥하여 파고들고 탐구하지 않는다. 마음을 애써 컨트롤하려는 미션 임포서블에만 죽자고 매달릴 뿐 마음 그 자체에 달려들려 하지 않는다. 

이럴 때 심타리 고약한 구루는 일갈한다. 마음을 컨트롤 해서 뭐하게? 불편한 마음 억누르고 즐거움 마음 부추긴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억누르면 더 솟아오르는 법인데. 불편함이 불편함이 아니고 즐거움이 즐거움이 아닌 줄 알아야지!

얘기가 길어졌는데, 아무튼 과거 중국이나 한국의 구루들은 흔히 이 두 가지 마음을 혼용해서 썼기 때문에 논리적인 마인드를 가진 현대의 초심자들은 자주 헷갈리게 된다. 나도 역시 그랬고.

구루가 마음에 관해서 이런 식으로 장황하고도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듣기에는 꽤 좋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좋은 것일까? 마음이 뭔지를 머리로 알았다고 해서 과연 마음을 진짜로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가에서는 본래마음을 흔히 <성품>이라고도 하는데 마음이 뭔지 알았다면 성품을 밝힌 것일까? 이른바 견성(見性)을 한 것일까?

대체로 지식은 호기심과 탐구하는 마음을 시들게 한다. 우리가 뭘 알았다고 할 때 그것은 대상에 관해서 더 알 가능성을, 더 깊이 만날 가능성을 차단하는 기능을 하기 쉽다. 우리는 저게 무슨 꽃일까, 궁금해 하다가도 누가 프리지아, 라고 대답해주면 아항, 하고는 그것으로 일을 끝낸다. 사실은 이름만 알았을 뿐인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대체로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프리지아의 본질이 아니라 그 이름뿐일 수도 있다.

앎과 소유는 쌍생아처럼 닮았다. 우리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는 탄탈로스의 고통을 겪지만 천신만고 끝에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거의 그 자리에서 그것을 버리다시피 한다. 소유는 욕망을, 관심을 시들게 하기 때문이다. 뭔가에 관한 앎도 역시 그렇다. 모를 때 우리는 열렬히 관심을 갖지만 알고 나면 그 대상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진다.

우리는 일상에서 노상 물을 사용하지만 정작 물에 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을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물의 이름과 쓰임새, 생김새, 수도요금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인데. 이렇게 머리로 아는 것으로 다 안다고 치부할 때 우리가 물의 신비, 그 생생함, 그 놀랍고 현묘한 본성과 만날 가능성은 아주 멀어진다.

 그래서 옛 구루들은 우리 앎의 천박함, 얄팍함을 자주 지적하고 사물의 외피가 아니라 본질에 접근하게 하려 애썼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다그쳤고 숭산스님은 “다만 모를 뿐 Only don,t know”이라는 화두로 미국의 눈 파란 제자들을 지도했다. 눈 밝은 이들은 우리가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모르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진리의 신비로운 본성을 끝내 알 수 없다. 머리로는 끝끝내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진리 혹은 마음은 천강(千江)에 뜬 달처럼 매 순간 우리 앞에 다채로운 모습으로 생생하게 현현하지만 이성으로만 사는 이들은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어서 그 신비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알았다고 해봤자 그저 이름과 쓰임새, 생김새, 화학 기호 정도나 안 것뿐 본질은 알지도 만나지도 못한 것이기가 쉽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알려고 애쓴다. 우리는 미지의 것들과 만나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 사람을 만나도, 낯선 곳에 새로 이사 가도, 새 직장이나 새 단체에 들어가도 만사 제쳐놓고 먼저 알려고 기를 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충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호기심과 흥미, 관심을 내려놓고 다른 데로 눈길을, 머리를 돌린다.

이와는 맥락이 약간 다른 얘기지만, 여성들이 가끔 남성들에게 짜증을 내는 게 머리로 아는 것에만 쏠리는  남성들의 이런 속성 때문이 아닐까도 싶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머리뿐만 아니라 감성도 많이 작동하고, 전두엽뿐만 아니라 측두엽도 잘 쓰기 때문에 전두엽만 발달한 남성들에게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닐까.

마음은 머리로 알고 바로 치워버릴 것이 아니다. 마음이라는 이름을 알고, 마음이 현묘하고 신비로운 것이라는 걸 알고, 나 자신과 온 우주의 본성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심지어 마음은 머리로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진짜로 안 게 아니다.

그래서 과거와 오늘의 구루들은 노상 제자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그렇게 노심초사해왔다. 노상 반지빠르게 돌아가는 그놈의 머리 작용을 그치게 하고 매 순간 사자처럼 곧장 마음으로 돌진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제 참 마음을 밝히게 하려고 그렇게 애써왔다. 이천오백년 전에 그렇게 하려고 애썼던 구루요 사자 조련사들의 원조 격인 붓다의 저 유명한 사구게(금강경) 하나를 더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맺도록 하자.

“마땅히 다음과 같이 청정한 마음을 써야 한다. . .
보이는 것을 구하기 위해 마음을 쓰지 말며,
소리, 냄새, 맛, 감촉, 기분의 만족을 위해 마음을 쓰지 말며,
마땅히 구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써야 한다.” 



                                                                                                                          
                                                                                                                     
ⓒ무주공산&사회적네트워크&2011년 6월 09일
 
 
 





하늘거울 11-06-09 22:59
 
잘 읽었습니다.
미송 11-06-09 23:38
 
잘 보았습니다.....
하이하바 11-06-10 00:58
 
흙덩이를 쫓아가는 개는 사판(事判), 주인을 무는 사자는 이판(理判)을 상징할 수도 있지 않을까합니다.
이판을 따르던 사판을 따르던 적어도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위만 하지 않아도 어지러운 세상이 되지는 않을텐데... 라는 아주 소박한 상상을 해봅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계속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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