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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
조회 1,109  |  추천 7  |  비추천 0  |  점수 40  |  2011-05-27 14:20
글쓴이 :   무주공산

혁명의 길
The way of Buddha 7부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니? 말장난 하나? 아니,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화두 같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명화나 예술작품 등을 볼 때 우리는 그런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그것에 관해 배운 내용에 따라서, 혹은 전문가들로부터 그것에 관해 들은 대로 그 작품을 보기 쉽다. 그리고 평소, 우리는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듣고 교육받은 대로 보기 쉽다. 독도 문제로 흥분한 한국 사람이라면 같은 일본 사람을 봐도 친일적인 타이완 사람과는 다르게 볼 것이다. 평소 자신의 인식이 굴러가는 모양새를 면밀히 살펴본 이들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귀로 본다고도 말할 수 있다.

또 우리는 귀로 듣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눈으로 듣는 경우가 많다. 같은 사람의 이야기라도 품위 있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거칠고 사나워 보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다르게 들린다. 같은 이야기라도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권위 있어 보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너절해 뵈는 부랑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다르게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눈으로 듣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경우가 비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수도 있다. 과학자들은 소리를 들으면 색이 보이고 색을 보면 소리가 들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구루들은 위와 같은 해석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제자들에게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는 말을 던질 수 있다. 그러면 제자들은 황당해진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정상이지, 어떻게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단 말이냐?

달마 이래로 간화선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중국이나 한국의 구루들은 이런 식의 엉뚱한 이야기들로 제자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제자들에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깨달아야 한다고 해놓고는 제자들이 깨달음을 좇을 때마다 “깨달아서 뭐하게?”라고 퉁박을 주기 일쑤다.

볼멘 제자가 답답해져서 짜증스럽게,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라고 물으면, “다 놓고, 그저 쉬어라,” 라고 말한다. 제자가 그럼, 쉬면 되겠구나 싶어서 쉴라치면 스승은 다시 “밥 버러지 같은 놈”, 이라고 욕한다. 제자가 다시 짜증이 나서 “저더러 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항변하면, 스승은 “쉬면 틀려”, 라고 한다. 제자가 다시 “그럼 쉬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항변하면, 스승은 “쉬지 않으면 더 틀려”, 라고 한다. 죽을 맛이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스승과 제자의 문답에서는 제자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어찌할 바를 몰라서 푸념처럼 내뱉는 이 <어쩌란 말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사람들은 선사들이 던지는 화두를 흔히 머리로 풀려고 애쓴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는 화두를 맨 위에서 설명한 방식대로 이해하려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화두가 풀린 것인가? 선사들은 그런 식으로 풀기를 바라서 그런 수수께끼를 던진 것일까?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선사들은 사대육신 멀쩡하고 똑똑하고 잘난 제자들을 왜 그렇게 이상한 말장난 같은 것들로 괴롭히고 들들 볶았을까? 요즘은 그런 답을 아는 이들이 꽤 많다. 진리는 언어로는 전달할 길이 없는 것(불립문자)인데 사람들은 늘 언어와 생각을 통해서만 진리에 접근하려 하기에 생각과 말길이 끊어지게 하기 위해 그런 방편을 쓴 것뿐이라고. 

다 잘 알다시피 언어와 생각은 이원론에 근거해 있다. 흑이 존재하려면 백이 존재해야 한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다. 아름다움이 있으면 추함이 있다. 흑과 백,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같은 개념들은 항상 쌍으로 생겨나며 단독으로는 존립하지 못한다. 흑이 없으면 백이 없고 악이 없으면 선이 없고 추함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없다. 그것들은 늘 상대에게 의존해서 존재한다.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비존재라는 개념을 근거로 해서 성립한다. 고양이는 고양이 아닌 모든 존재를 근거로 해서 존재한다.

우리의 생각과 언어는 시종일관 이렇게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개념들은 엄밀히 말해서 실재reality가 아니다. 명실상부한 실재라면 다른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나 개념 등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실제의 지형과 지도는 전혀 다르다. 있는 그대로의 장미와 <장미라는 이름, 장미에 대한 설명, 장미에 대한 가치관, 장미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후자는 장미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일 뿐 장미 그 자체는 아니다. 연기법에 의거해서 투철하게 바라볼 때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낱낱의 사물들조차도 경계가 불분명하고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몸짓들에 불과한데 하물며 사고 내용이나 개념들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하지만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수많은 것들에 아주 짙게 물들어 있어서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진리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과거에 배워 익힌 대로 본다. 그런 과정은 너무나 재빨리,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져서 우리는 play를 하지 않고 그냥 배운 대로 replay 할뿐이지만 자기가 replay를 하는 게 아니라 play를 한다고 믿는다.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는다. 우리는 지도만 보면서 실제 지형을 보고 있다고 믿는다.

총기 있어 보이는 제자가 새로 들어오면 스승은 그에게 진리의 실상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오직 그것뿐이라고 하는 실상을. 하지만 제자의 머리는 과거에 배워 익힌 것들로 꽉 차 있어서 스승의 말이 액면 그대로 들어가지 않고 replay의 회로를 재빨리 거쳐 재해석되어서 들어간다. 알려주려 해도 알려줄 길이 없다.

그래서 스승은 꼭 심타리 고약한 늙은이처럼 말을 꽈배기처럼 꽈서 들려준다. 조주의 제자가 조주에게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조주는 "판치생모" 라거나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는데 판자에 이빨이 났다니? 심타리가 더 고약한 어떤 선사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는 제자에게 “마른 똥막대기니라”, 고 했다. 아니 존귀하고 존귀한 붓다, 그리고 온 우주의 본바탕의 상징인 붓다를 마른 똥막대기라고 하다니.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구나.

스승은 제자의 귀를 막고 코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아서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기 위한 방편으로 이렇게 터무니없고 비합리적인 말을 서슴치 않는다. <토끼뿔>이나 <거북털> 같은 말들도 다 마찬가지다. 토끼에게 무슨 뿔이 있고, 거북의 등딱지에 무슨 털이 나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말들이 제자들의 말길을 끊어버리기 위해 만들어낸 터무니 없는 말, 비논리적인 말들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마음이 열린 이들에게는 토끼귀라는 말이나 토끼뿔이라는 말, 거북 등딱지라는 말과 거북털이라는 말이 본질적으로는 하등 다르지 않게 들어온다.  

스승이 이렇게 가축떼를 우리 안에 몰아넣듯이 제자들을 마구 몰아대도 머리가 반지빠르게 돌아가는 영리한 제자들은 용케 거기서 빠져나갈 길을 찾으려 애를 쓴다. 스승이 죽으라고 해도 끝내 죽지 않으려고 용을 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을 참구하려 하지 않고 통로 곁으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소나 양처럼 머리만 재빨리 굴려 스승이 던진 수수께끼를 용케 제 깜냥으로 풀어낸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는 화두에 대한 그럴싸한 설명 같은 것. 어떤 제자들은 또 스승이 그런 말을 던지는 의도까지도 유추해내서 정확하게 설명한다. 이 화두는 우리를 막다른 골목길에 밀어 넣어 말길이 끊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오직 마음뿐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스승의 의중을 이렇게 제대로 파악하면 제자는 그 화두를 풀어낸 것인가? 전혀 아니다. 제자가 이렇게 알았다고 득의만면해하면 스승의 할과 방이 그의 정수리에 떨어진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잔재주 부리는 손오공 같은 놈! 밥값을 하려면 아직 멀었다!

연기법(인연법)을 철저히 궁구하면 이 세상에는 한 물건도 없고 오직 <그것It>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낱낱의 사물들은 경계가 없어서 오직 <그것>의 오만가지 작용의 소산들일 뿐이다. 불가에서는 <그것>을 일러 흔히 마음이라고 하고, 그래서 오직 마음뿐이라고 한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는 화두를 우리는 반지빠른 제자들처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아주 합리적으로 풀어 설명할 수 있다.

모든 건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다.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눈과 귀는 아무 작용도 하지 못한다. 시체의 눈이 보고 귀가 듣는다는 소리를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마음이 깃들어 생명이 있으니 생명이 다 하면 눈도, 귀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마음이 보고 마음이 듣는 걸 일러서 우리는 눈이 보고 귀가 듣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눈으로 듣는다 한들, 귀로 본다 한들 무슨 하자가 있겠는가? 애초에 눈이 보고 귀가 듣는다는 말이 헛것을 보고 지껄이는 망녕 된 이야기라면 눈이 듣고 귀가 본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눈으로 핥고 귀로 씹어 먹는다고 한들?

사실, 눈과 귀에 무슨 경계가 있겠는가? 어디부터가 눈이고 어디부터가 눈이 아닌가? 우리 몸은 하나의 전체다. 우리는 편의상 우리 몸의 각 부분을 하나하나 다 나눠서 여기는 손톱이고 저기는 손가락이고 팔이고 다리고 가슴이고 심장이고 허파라는 식으로 편리하게 나눠서 보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로 연결된 전체다. 식물도 그렇다. 우리는 식물을 잎과 가지, 줄기, 뿌리 등으로 나눠서 보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로 연결된 전체다. 우리가 편의상으로 나눠서 볼 뿐이다.
 
이런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자신의 손과 팔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리고 거기서 손과 팔을 나눠주는 명확한 경계선을 찾아내보도록 하라. 당신의 손과 팔목을 나누는 뚜렷한 무슨 선이 보이는가? 그런 것은 본래 없다. 그러니 왼손과 오른손이 사실은 다 하나다. 손과 간과 쓸개가 하나고.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국어시간만 되면 재미가 없어서 졸았다. 선생님이 존다고 야단치면 국어책을 세워 가림막으로 삼고 백지에다가 볼펜으로 주먹 쥔 내 손을 그렸다. 그거 하나 그리면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하도 주먹을 그리다 보니 나중에는 주먹 스케치 모양새가 제법 그럴싸해졌다. 미술반 친구가 그걸 보고 나더러 미술반에 들어오라고 부추길 정도였다.

국어시간이 그토록 재미없었던 건 대다수 국어 선생님들이 살아 있는 글들을 꼭 외과의사처럼 하나하나 토막 내고 해부해서 요리조리 분석하고 해석해댔기 때문이다. 우리 때의 대다수 국어 교사들은 산문이건 시건 간에 모든 글을 생물실험실의 개구리처럼 마취시켜놓고 해부해서 하나하나 들어냈다. 요건 무슨 뜻이고, 요건 자음접변이고, 요건 두음법칙이고, 요건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처지를 뜻하고. . .

나는 그렇게 해부해서 죽어버린 글의 토막들, 시의 토막들을 배우는 게 한없이 지겨웠다. 차라리 일년에 책을 백권 정도 보라고나 할 것이지 책 두권 갖고 일년 동안 고사지낼 건 뭔구? 지나놓고 보니 좀 어이가 없다. 그런 놈의 학교를 뭐 하러 그렇게 죽자고 다녔는지. 요즘은 우리 때보다 많이 개명된 시대니 요즘의 국어선생님들은 그때하고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생물이라는 말을 아무데나 갖다 쓰기를 좋아한다. 정치도 생물이고, 축구도 생물이고, 시장도 생물이란다. 유기체처럼 고유한, 혹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진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 말은 맞다. 그런 의미에서는 글도 그림도 다 생명체다. 유기적인 전체다. 그러니 글을 문헌학자처럼 요리조리 토막내서 낱낱이 분석하고 해석하는 짓은 글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저해하는 작용을 할 가능성이 있다.

얘기가 변두리로 샜다. 아무튼 스승은 제자에게 존재의 실상을 알려주려 애쓴다. 모든 것은 그저 마음뿐이라는 걸. 하지만 제자가 이걸 머리로 알았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머리로 안 것은 안 것이 아니다. 그렇게 알아봤자 일상 삶에서 별다른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마음뿐인 이치를 알았다고 해서 그가 사사건건 본인을 괴롭히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건 아니다. 그는 돌아서면 금방 진리의 실상을 다 잊어버리고 끊임없이 경계에 사로잡히고 휘둘리며, 본질을 잃고 노상 변두리에서 헤매 다닌다.

결국 불가에서의 화두란 이렇게 끊임없이 경계를 쫓아다니는 짓을 그치게 하기 위한 철두철미한 방편이다. 화두는 그것이 타파될 때까지 끝까지 잡아야 한다. 일주일을 잡든 십 년을 잡든 간에 아무튼 오로지 그것만 잡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자나깨나 화두만 잡고 있다 보면 지성하게 작용하던 생각과 감정의 작용이 그치고 어느덧 온 우주에 화두 하나만 환하게 빛을 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까지도 깨져나가면서 그 전까지 그를 완강하게 지배하던 온갖 이치, 가치관, 의미망, 온갖 경계의 벽이 무너져 나간다. 그리고 오직 마음뿐이라는 진리의 실상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 전까지 굳건하게 실재한다고 믿었던 모든 경계들이 사라지고 오직 마음뿐인 실상이 뚜렷이 드러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자유자재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실상이 훤히 드러나고 나면 과거에 무수히 들었던 그 수수께끼 같은 수많은 선문답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들인가가 확연해진다. 실은 더없이 간단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팔만사천의 변주가 필요했다는 것도. 우리가 바로 곁에 있는 것을 알기 위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와야 했다는 것도. 그리고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는 말이, 토끼뿔과 거북털 같은 말들이 울퉁불퉁하거나 모나게 들리지 않고 순일하게 들린다.

진리의 실상을 알기 위한 방편은 화두참구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관조선이라고 하는 위빠사나 명상법도 있고 일본에서 깊이 뿌리내린 묵조선도 있다. 요즘 사람들은 참선보다는 위빠사나 명상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참선을 하지 않는 이들도 무의식중에 화두를 잡곤 한다. 자기와 관련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주야장창 붙잡고 있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그래서 그런지 일반인들도 화두라는 말을 곧잘 쓴다.

자기와 관련된 그런 화두를 풀려 할 때 우리는 분석적인 기법을 쓸 수도 있다. 종이에 도해하듯 그려놓고 꼼꼼히 따져보면서 곰곰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방법들을 동원해도 상관은 없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그저 문제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 답이 머리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직관적인 통찰처럼 터져나오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쥐가 날 정도로 머리를 쥐어짜서 추론해낸 결론이라는 건 대체로 우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를 화두처럼 집요하게 붙잡고 있다가 어느 땐가 직관적인 통찰이 일어날 때는 갑자기 속이 툭 터지면서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것이 분석과 해석을 통한 죽은 결론이 아니라 진정한 통찰, 진짜 지혜라는 것은 당사자 스스로가 잘 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직관적인 통찰만이 우리에게 잠시나마 이런 식의 감동과 해방감을 안겨주곤 하니까.

붓다를 비롯한 수많은 구루들은 이구동성으로 참다운 지혜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본래 내재해 있으며, 그 지혜를 가로막고 있던 구름이나 안개 같은 것들만 걷어버리고 나면 그것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참다운 수행은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요 진리니 그것을 드러내기만 된다. 그러니 참다운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라면 제 마음을 보는 마음공부 외에 다른 무슨 할 일이 더 있겠는가. 이에 관해 무주(無住)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을 알면 무념(無念)이 되고,
성품을 보면 해탈된다.
식심(識心)을 여의고 성품을 본다는 이 일 이외에,
다시 어떤 법문으로 무상의 보리를 체득하겠는가?”

여기서 식심은 마음에서 이는 생각과 느낌, 감정과 같은 경계들을 뜻하며 성품은 그 바탕(전에 영상을 비춰주는 스크린에 비유한 바가 있다)을 뜻한다. 무주의 말은 이런 식심이 근본바탕 위에서 구르는 허망하고 빈 것이요 어지러운 환영들에 지나지 않음을 뚜렷이 통찰하고서 여의는 일 외에는 깨달을 방법이 달리 없다는 뜻이다. 



                                                                                                                          
                                                                                                                     ⓒ무주공산&사회적네트워크&2011년 5월 27일
 
 





미송 11-05-27 22:48
 
난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듯고... 창밖에 암컷개구리를 유혹하는 숫컷개구리의 우렁찬 목청을봅니다...감사.^^
하이하바 11-05-28 00:29
 
무주공산님의 글 잘보고 있습니다. 글속에서 자애로운 마음이 느껴집니다. 반야바라밀_()_
동쪽달마 11-05-28 10:37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아름다운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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