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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노래를 부르지 말라
조회 1,136  |  추천 9  |  비추천 0  |  점수 50  |  2011-03-28 16:08
글쓴이 :   무주공산

혁명의 길
The way of Buddha 3

예전에 민혜경이라는 가수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나는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그 노래에 푹 빠졌다. 가사도 좋고 노래도 참 좋네, 하면서 감탄했다. 그런데 기득권 인간들이 가사가 불온하다고 해서 금지곡의 딱지를 붙여버렸다. 그 바람에 그 좋은 노래가 그만 사장되고 말았다. 

내 인생은 당연히 내것이지 남의 것인가? 그런데도 그 노래에 <금지> 딱지를 붙여버렸다면 아마도 그 노래가 그렇지 않아도 불온한 자식들, 혹은 청소년들을 웬통 반항아들로 만들까봐 겁먹어서 그랬겠지. 그 인간들은 아마도 <네 인생은 철저히 내 것>이라는 종래의 기득권을 철저히 옹호하고 싶었나보다. 어린 시절, 자기네 인생을 차압당했던 게 꽤나 억울해서 자기네도 자식들이나 자식벌 되는 젊은이들의 인생을 차압하고 싶었나보다.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모토는 참 중요하다. <남의 노래를 부르지 않고 내 노래를 부르는 것> 역시 참으로 중요하다.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모든 노력은 부질없다. 그저 내가 누군지 바로 알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세상에서 수행을 한다고 하는 많은 이들은 물론이요 불법(佛法) 공부를 한다고 하는 이들까지도 흔히 잘못된 길을 밟곤 한다. 온갖 수행방편으로 쿵푸(공부)를 하는 건 좋은데 흔히 인연화합체에 불과한 이 몸을 갈고 닦아 장차 근사한 몸으로 재탄생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수행을 하려들기 때문이다. 허구적 관념체에 불과한 에고를 버리려 하지 않고 그 에고를 날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행을 하려 들기 때문이다. 우리 중생들은 대체로 속이 허하고 궁기가 들었기 때문에 늘 배가 고파 허덕이는 나머지 사랑과 인정이라는 뻥튀기 과자 같은 것들로 배를 채우려 들고,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나로 변신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런 수행법을 일러 흔히 이승법(二乘法)적 수행이라고 한다. 자신이 이미 참다운 실재요,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처인 자가 다시 부처가 되려고 하는 짓. 그래서 옛 스승들은 이승법적인 미로에서 헤매는 제자들을 보고 "부처가 다시 부처를 찾는구나," 라고 개탄하곤 했다. 내 옛 스승은 이런 경우를 일러 "이미 서울에 와 있는 자가 다시 서울 가는 길을 열심히 찾는" 짓으로 비유했다.  

이승적 수행의 예는 다양하다. 지극히 세속적인 욕망의 형태에서 비롯된 것들도 있고 영적인 욕망의 형태에서 비롯된 것들도 있다. 예컨대 어떤 이들은 남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능력(타심통)을 비롯한 온갖 신기한 능력을 갖고 싶다는 내적인 욕망에서 그런 훈련을 열심히 할 수도 있다.그런 이가 십년간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아 마침내 그런 능력을 갖게 되면  남들이 탄복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 덕에 돈도 좀 벌 수 있을지 모르고.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그게 본인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본인은 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어떤 이는 예수처럼 물 위를 걸어가는 능력을, 또 어떤 이는 마르셀 에메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가루가루처럼 벽을 그냥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어서 그런 기술들을 연마하려 들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십년, 이십년 걸려서 그런 능력을 가졌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은 그저 배를 타고 건너가면 되고, 벽은 그저 문으로 지나가면 될 일인데.    

이른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대체로 오십보 백보인 경우가 많다. 깨닫고자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은 흔히 자신의 심신과 에고를 강화하는 것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깨달아서 근사한 사람이 되어 남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고자하는 욕망에서 수행을 한다면 그건 누구말마따나 마이클 잭슨처럼 앞으로 가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뒤로 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이미 부처인줄도 모르고 제 마음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괜시리 제 몸을 꽈배기처럼 이리 꼬고 저리 꼬거나 십년동안 장좌불와를 하는 식으로 제 몸을 괴롭히는 것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붓다 자신이 이미 설산에서 육년 고행한 게 아무 덕이 없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저 유명한 중국의 남악 회양선사와 마조 도일선사의 일화가 그 좋은 예가 되어준다.    

마조 도일이 산속에서 혼자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는데 남악 회양선사가 우연히 지나가다 보고 마조 도일이 비범한 인재라는 걸 알아봤다. 회양선사가 마조에게 무얼 하느냐 묻자 마조는 좌선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회양선사가 무엇 때문에 좌선을 하느냐고 하자 마조는 부처가 되려 한다, 고 대답했다. (이미 부처인 자가 다시 부처가 되려고 좌선하는 게 어리석은 짓이나 마조는 미처 그걸 알지 못했다.) 그러자 짖궂은 회양선사는 이튿날 아침 좌선하는 마조 곁에서 기와장을 숫돌에 열심히 갈기 시작했다. 회양선사의 해괴한 짓을 본 마조는 무얼 하시느냐 물었고, 회양선사는 기와장 갈아서 거울 만들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마조가 어이가 없어서 기와장으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느냐고 퉁을 주자 회양선사는 기와로 거울 만들 수 없다면  좌선해서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마조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고 회양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회양선사는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채찍으로 소를 때려야 하는가, 수레바퀴를 때려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 말문이 막힌 마조에게 회양선사는 네 안에서 이미 환하게 빛나는 불성의 빛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밖으로만 치닫는다면 영원히 깨달을 가능성은 없다고 지도한다. 마음이 곧 부처(즉심즉불)이니 그 마음을 보려고 하라, 그 외의 어떤 짓도 다 부질없다고.  
 
그렇다. 흔히 <참나>라고 신성시하는 그것은 사실 의식적으로 찾으면 어디에도 없지만 우리 내면에서 온갖 생각이, 감정이, 느낌이, 의식이 인연에 따라서 찰나찰나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환히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 일본 원전 사태 기사를 보면 우리 내면에서는 불안감이 일어나고, 살인범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한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이 있고 한 생각이 사라지면 마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가(佛家)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참나, 혹은 마음은 영화관의 스크린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스크린에 온갖 영상이 스쳐 지나가지만 변하는 것은 영상들뿐 스크린은 변하지 않는다.

참답게 수행하는 이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영상들을 쫓아가지 않고 그저 주시하고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영상들을 실체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영상들 때문에 울고 웃지 않는다. 아니, 울고 웃어도 그저 인연 따라 그렇게 할 뿐 울고 웃는 일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인연 따라 웃고 인연 따라 울 뿐이다. 그들에게는 영상들과 스크린이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참나를 스크린이라는 물질적인 것으로 비유했지만 그것은 사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해부해서 찾아낼 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내면에서 온갖 감정과 생각과 의식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온갖 모양으로 비춰준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참다운 나요, 실재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 마음을 주시하고 관조하는 공부를 일러 <마음 공부>라고 한다. 

이 세상의 어떤 수행방편도 오직 그것뿐인 것의 작용을 보는 <마음공부>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외의 공부는 죄다 문 앞에서 먼지만 뿌옇게 일으키는 짓이다. 그래서 흔히 이승(二乘)의 문 앞에는 "시체가 즐비하다"고 한다. 평생 엉뚱한 짓만 하다 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초심자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과 감정을 비춰주는 것이 곧 참다운 자기라는 사실을 확연히 알아야 하고 그것에 주시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눈으로는 눈을 볼 수 없고 칼로는 칼을 썰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마음으로는 마음을 볼 수 없다. 다만 그저 우리는 내면에서 생각과 감정이 인연 따라 끊임없이 일어날 때 그런 것들을 비춰주는 바탕이 바로 그것임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런 근본 이치를 머리로서가 아니라 직관적 통찰을 통해 매 순간 알아차리는 것을 일러 우리는 흔히 <자각>이라고 한다.

이런 진실을 어느 정도 통찰하고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도 흔히 길을 잃고 헤맬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구루와 제자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문제들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구루들이 있고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제자들에게 "혼자서는 이 길을 가지 못한다" 고 단언한다. 즉, 초심자들은 제 마음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헤매기 쉬우니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해줄 구루가 필요하다고.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세상의 구루들 중에는 사기꾼들이 많고 많아 꽤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이들의 마수에 빠져 한 동안 허송세월할 수 있다. 불교 수행을 오래 한 내 친구는 구루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98퍼센트는 가짜라고 단언한다.

요컨대 정치가가 사기꾼일 확율보다 훨씬 더 높다는 얘기다. 그리고 2퍼센트의 진짜도 늘 높은 영성 레벨을 유지하는 게 아니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방만하게 지내다보면 타락하고 부패할 수 있다. 이때의 타락은 물론 영적인 의미에서의 전락을 뜻한다. 나는 그렇게 전락한 구루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저 유명한 라즈니쉬라 여긴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끼란 바바의 이야기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끼란은 라즈니쉬 밑에서 오래도록 온갖 수행방편을 다 따라서 했지만 별 진척이 없었다. 그러다 라즈니쉬가 미국으로 간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간 자신이 그저 라즈니쉬가 시키는대로만 하다보면 공부가 잘 되려니 생각하고 긴 잠을 잤다는 사실을, 그리고 공부하려는 자신의 열망이 세속적 욕망과 별로 다르지 않은 영적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찰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깨달음에 대한 갈망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놓고 쉬었다. 쉰다는 생각조차도 버렸다. 그렇게 라즈니쉬로부터 해방되고 깨닫고자 하는 욕망조차도 버렸을 때야 비로소 그에게는 자각의 빛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찾아들은 것이었을까? 원래부터 환하게 빛나던 것이 드러난 것뿐이지. 라즈니쉬의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참다운 자각을 이룬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참다운 구루에게서 지도를 받는 제자들은 어느 때까지는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세상에서 익숙해진 온갖 삶의 방식, 이데올로기, 망상들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자신이 소꼽장난을 하는 줄도 모르고 소꼽장난에 취해서 울고 웃고 하던 습성을 버리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제 발로 설 때가 되면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스승을 버려야 한다. 진리의 실상에서는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기 때문이다. 강을 건널 때는 뗏목이 필요하지만 건너고 나서도 뗏목을 지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뗏목의 비유는 자각을 이루기 전까지 받들어모시던 온갖 가르침의 내용과 방편들을 뜻하는 것이지만 스승조차도 방편이니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중국의 법상 스님은 마조 선사를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이 부처냐 물었다. 그러자 마조는 "마음이 곧 부처(즉심즉불)다" 라고 답했다. 그러자 법상은 그 말의 참뜻을 깨닫고 그때부터 대매산에 정착해서 마음공부에 전념했다. 한 동안 세월이 지난 뒤 마조는 법상의 공부가 얼마나 진척되었나 알아보기 위해 제자 한 사람을 대매산으로 보냈다. 

그 제자가 법상에게 "스님은 마조 스님을 뵙고 무엇을 얻었기에 이 산에 머물면서 공부하십니까?" 라 물었고, 법상은 "그 분이 내게 마음이 곧 부처, 라고 말씀하셔서 그 말씀대로 공부하고 있다" 고 답했다. 제자는 요즘 마조스님의 법문이 달라졌다, 요즘에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비심비불)고 하신다고 했다. 그러자 법상은 발끈하면서 "이 늙은이가 끝도 없이 사람을 혼동시키는구나. 너는 네 마음대로 비심비불해라, 나는 오직 즉심즉불만 할란다," 라고 답했다. 제자로부터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마조는 "매실이 익었구나," 라고 말했다.
 
법상이 공부한 곳이 대매산이라는 곳이고 대매산이 <큰매실산>이라는 뜻이어서 마조는 그렇게 말했는데, 이것은 곧 법상이 이제는 <남의 노래를 부르지 않고 제 노래를 부를 줄 알게 되었구나>라는 말에 다름아니다. 

제자들이 흔히 구루가 일러준 말들을 앵무새처럼 외기나 할 뿐 그 가르침의 참뜻을 깊이 새기면서 스스로 제 발로 서는 공부를 하려들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툭하면 구루를 우상시하고 자신들은 천대한다.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다르기에 스스로의 존귀함은 까맣게 잊고 늘 그렇게 떠받들기만 하는지. 스승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이 세상 모든 환영들과 이데올로기와 관념들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신의 노래를 저답게 부를 수 있다. 스승은 인연화합에 따라 설법을 하고 제자도 인연화합에 따라 설법을 들으며 공부할 뿐이다. 

우리는 가끔 구루들을 자신이 그리는 스승상에 따라서 보곤 한다. 저 분은 구루이니 인격자고, 덕이 높고, 너그럽고, 한없이 원만한 분이겠거니 한다. 그러다 그 구루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실망해서 돌아서곤 한다. 어리석은 일이다.

구루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인연법을 초월한 바위같은 존재, 무정물과도 같은 존재, 위인전 작가가 각색해낸 것같은 존재일 것이다. 어떤 인간이 개성과 특성과 자기 다움이 없겠는가. 그리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 그런 개성을 왜 내가 그린 스승상에 억지로 끼워맞추려 하는가. 그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 것을. 다만 그는 실상을 훤히 보면서 자기답게 사는 사람이고, 나는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 자기다움을 뜯어고쳐 다른 다움을 지닌 인간이 되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을. 

구루들 중에는 성미가 급한 사람도 있고, 물욕이 좀 많은 사람도 있고, 떠받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속이 좁은 사람도 있고, 상처를 잘 받는 사람도 있고, 이기적인 요소가 강한 사람도 있다. 세상의 일반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과 일반인들이 다른 것은, 그들은 자기의 실체가 뭔지 알고, 존재의 실상을 훤히 알고, 늘 주시의 초점을 밖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그 반대라고 생각하면 되고. 그런 점들만 다를 뿐 나머지는 똑같다.

세상의 구루들은 툭하면 제 아내(아내가 있을 경우)들과 다투고, 영적 권력을 탐하기도 하고, 어떤 제자는 친애하고 또 어떤 제자는 싫어하며, 가끔 제자들의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어떤 물건을 탐내기도 하고, 예쁜 여자를 보면 성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감정들은 다 인연 따라 일어날 뿐이다. 

그러니 참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은 그저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자기의 몸 마음에서 벌어지는 온갖 만화경을 주시하며 주어진 인연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매 순간 즐기면서 살아가면 될 것이다. 과거 화계사 조실 숭산스님에게서 지도를 받은 현각이라는 이는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요즘에는 <순간경>을 즐겨 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여기서 <순간경>이라 함은 붓다의 가르침을 담은 진짜 경전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가려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원래 자책하고 자기비하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좀 그러하다. 그런데 지금은 돌아가신 선배 도반 한 분은 내가 내 인간적인 면모에서 나오는 언행에 대해 자책할 때마다 "그게 뭐가 문제야? 뭐가 잘못됐는데?' 했다. 그분의 그런 말은 매번 내게 깊은 위로가 되었다. 정말 그게 뭐 잘못된 거지? 그저 인연따라 말하고 행동했을 뿐인데? 그런 면에서 그분은 진정으로 눈을 뜬 분이었다. 그래서 요즘에도 그런 감정이 일어나면 스스로 혼자서 "뭐가 문제지? 뭐가 잘못됐는데? No Problem" 한다. 

나는 이른바 수행이라는 걸 하지 않는 분들도 그저 자기 자신을 비하하지 말고 늘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서 살았으면 한다. 자기는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더없이 존귀한 존재요 물리적인 우주의 범주를 넘어서는 우주와 동렬의 존재임을 믿고(이럴 때는 믿음이 필요하다), 자기의 심신은 그저 인연화합의 소산이니 그 인연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자기를 자기 아닌 어떤 존재로 자꾸 바꾸려 들지는 말았으면 한다. 매사에 자기를 나무라지도 말고. 이 세상에는 인연따라 곰도 있고, 여우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토끼도 있다. 

그런데 토끼가 호랑이처럼 의연하고 당당하고 용맹하게 살고 싶어하고, 곰이 여우처럼 상황에 따라 재기 있고 반지빠르게 살고 싶어한다면 그건 잘 되지도 않을 일일뿐더러 당자에게 고통만 가중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저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답게 자연스럽게 살기만 해도 본인들에게 큰 덕이 될 것이라 여긴다. 

세상에는 본래 문제가 없으니 답도 없다. 답이 없으니 정답과 오답은 더더욱 없다. 이래저래 "노 프로블럼"은 참 좋은 말인 것 같다.




동쪽달마 11-03-29 11:35
 
끊지 못하고 늘어나는 담배처럼 무의식 중에 머리언저리를 뱅뱅도는 재미있는 글, 잘 읽고 갑니다.
포커스 11-03-29 13:19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신을 아는것 그것이 가장 어려운것 같습니다...
응무소주 11-03-30 11:00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일호 11-04-02 14:02
 
끼란바바를 여기에서 보다니 놀랍습니다. ^^
저도 한참을 어둠속에서 헤매다가 끼란바바의 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답을 찾는 것에 있지 않고, 문제의 소멸에 있다고 봅니다.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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