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참다운 혁명의 길 |
조회 1,480 |
추천 9 |
비추천 0 |
점수 50 |
2011-03-06 12:27 |
|
|

80년대 초 중반은 우리 현대사에서 문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절이라 할 만한 시점이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오랜 군사파쇼 시스템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몸을 던져 싸웠던 시절. 그 시대에 운동은 하나의 트렌드였다. 과거 같으면 절대로 그런 운동에 뛰어들 것 같지 않은 많은 젊은이가 시대의 그런 흐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집권 세력의 압제에 도전했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이 사회에도 진정한 민주화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트렌드를 선도한 사람들에는 속하지 않았으나 그 시대의 상당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흐름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했다. 그런데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이른바 운동권에 속한 이들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나는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을 내심 존경하고 그들이 인격적으로도 성숙하고 원만한 사람이거니 했지만 정작 그 사람들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알고 나면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부르짖는 이념만 참신하지 그 인간은 수구보구 못지 않게 권력지향적이고 헤게모니에 집착하며, 남녀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여성과의 실제적인 관계에서는 가부장적인 권위에 집착하고, 그 내면은 부드럽고 따듯한 기운이 아니라 매서운 비판의식과 증오의 기운만 승해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나는 그들이 괴물과 싸우는 또다른 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의 운동은 참다운 각성과 결단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시대의 트렌드에 편승하는 또다른 떼거리 행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만일 그 시절에 록 뮤직이 시대의 트렌드였다고 한다면 그들 중의 상당수는 아마 로커가 되겠다고 맹렬하게 설쳐댔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런 이들이 이루어낸 성과마저 폄하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시대의 트렌드를 추종하는 무리의 하나에 불과했다. 별로 두드러지지도 않은 조용한 추종자.
나는 그때서야 참다운 혁명은 외부의 혁명이 아니라 내부의 혁명이라는 것을 통찰했다. 혁명이란 흔히 세상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서 세상을 뜯어고치겠다고 나서는 경우를 일컫는다. 사회혁명이 바로 그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렇게 외부 시스템만 뜯어고친다고 해서 인류 사회가 진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를 암만 바꿔도 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외부의 변혁을 꾀하는 이들의 내면이 성숙하고 충실하지 않으면 흔히 사랑이나 평화를 지향하는 혁명이 아니라 증오와 질시, 잔학성에 의한 혁명을 추구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중국의 홍위병들이나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을 학살한 크메르 루즈 게릴라들에게서 그 전형적인 예들을 볼 수 있다.
서론이 길어졌다. 요컨대 나는 지난 시대의 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혁명은 외적인 혁명이 아니라 내적 혁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내면이 성숙해야 비로소 외부의 참다운 변혁도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요즘에도 가끔 아고라 같은 데를 들어가보면 MB를 욕하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나도 MB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의 하나이기에 그 의견들 자체에는 대체로 동조하나 그 글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기류에 나도 모르게 섬짓한 기분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 MB의 정책적 오류를 비판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에 과도한 분노와 증오와 혼란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 과도해 보이는 증오와 분노와 혼란의 진짜 표적이 사실은 MB가 아니라 가부장적인 어떤 존재들, 일테면 권위적인 부모나 교사, 혹은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살지 못하게 하고 때이르게 입시지옥으로 밀어넣어 학교나 학원이라는 감옥에서 성장하게 만든 시스템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면서 받은 상처로 인한 분노와 증오가 MB에게 모조리 투사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의 분노와 증오가 섬뜩해보이는 것은 과거에 노무현 전대통령 역시 그와 비슷한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기도 한 것 같다는 점 때문이다. 노대통령의 집권 후반기에 수구보수 진영에서 진보개혁 진영에 이르는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노대통령을 무분별하게 공격하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일반인들까지 마구 비판의 대열에 합세한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노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MB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좀 달랐던 것 같고 증오와 분노의 강도에도 차이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하나 그 본질은 비슷해 보인다.
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적인 증오와 혼란에서 비롯된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내적인 평화와 사랑을 통한 행위만이 참다운 운동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안팎이 가지런한 운동이 될 수 있다. 물론 우리 내면에서 이는 순수한 분노도 사회운동의 중요한 모티브가 될 수 있다. 아니, 이런 분노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순수한 연민은 자연히 가진 자들의 몰염치함에 대한 분노를 낳으니까. 많은 사회혁명의 기폭제가 된 것은 바로 이런 분노였다.
내가 <컴패션과 사이코패스>라는 글에서 컴패션을 뭐라고 옮겨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사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 중의 비(悲)에 해당한다. 자비가 사랑과 연민의 줄인말이라고 한다면 비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 함께 슬퍼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슬퍼하는 마음은 그런 이들의 고통을 촉발시키는 데 일조한 이들에 대한 분노를 자연스럽게 촉발시킨다.
그러니 함께 슬퍼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이유 모르게(사실은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본인은 미처 알지 못하는) 들끓는 증오, 질시,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상처의 고통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에서 촉발된 분노라면 그 분노는 행위로 옮기지 않는 것이 좋다. 스스로를 더 다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혹독한 상처를 안겨줄 가능성이 많으니까.
주위에서 가끔 자기에게 내면적인 깊은 상처를 입힌 부모나 교사, 형제, 배우자, 혹은 그 주변 사람들을 용서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이들을 본다. 그들에 대한 미움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바람에 자기 마음이 노상 지옥 속을 헤매기 때문이다. 미워하면 할수록 자기만 더 다친다.
그럴 때 현명한 이들은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그것은 억지춘향이 될 뿐이다. 그냥 용서하려 해봤자 용서가 되지 않고 미움만 더 커진다. 그럴 때 참으로 필요한 일은 용서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는 일이다. 자기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려 할 게 아니라 자기의 입장을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상처입힌 이들을 용서할 가능성이 생긴다. 부모나 교사 혹은 배우자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자기 내면에서 그들과 진정으로 화해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 내면은 참다운 평화와 안식을 맛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회복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한 외적 혁명은 바로 이러한 내적인 혁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적으로 성숙한 이들, 내적인 평화와 사랑을 회복한 이들이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따듯한 연민, 함께 슬퍼하는 마음에서 추구하는 변혁이나 혁명이야말로 참다운 혁명이라 여긴다. 그럴 때는 MB조차도 <내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가증스러운 쥐새끼>가 아니라 그저 배우기를 잘못 배웠거나 잘못된 패러다임에 따라 행동할 뿐인 가련한 노인네 정도로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자신의 그런 부정적인 면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무분별하게 미워하고 욕하고 돌을 던지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건강한 비판이 아니라 미성숙한 짓이며, 더 나아가 정신병적 징후라고밖에 볼 수 없다.
PS-아침에 산책하는 동안 문득, 앞으로 이 난에서 내적인 혁명에 관한 시리즈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그 시리즈의 제목은 <혁명의 길 The way of buddha>로 정했다.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