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B 마이너 리포터 002 도시농업
갓 볶은 원두커피에 뜨거운 물을 내리면 달콤한 향내가 피어오른다.
원두커피의 이 향은 맛보다 아름답다.
언제 다시 이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을까. 코와 혀 끝에서 느껴지는 이 향과 맛.
살아 있음을 선명하게 느끼고 싶다면 죽음을 바로 옆에 달고 있으면 된다고 하던가.
죽음을 직시 할수록 삶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말 만큼이나 아이러니 하게 느낀 것이 바로 도시농업이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도시에서 무슨 농업을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더미 위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든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실천하는 선구자는 어디에든 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예전에는 남의 나라 이야기 였지만 지금은
이 대한민국에서도 도시농업을 꿈꾸고 실천하는 도시농부들이 있다.
부평역 남쪽 출구에 도시농업을 위한 강좌가 있어 참석을 했다.
강의시간이 오후 인지라 다들 아주머니고 남자는 나 혼자 뿐이다.
왜 오후에 강의를 잡았냐고 물었는데
그 이유는 강의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냥 어중이 떠중이는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나에게 이런 말을 한 건 정말 배울 의사가 있느냐는 것일 것이다.
배울 의사가 있냐고?
사흘 동안 쌀 한 톨 못 먹은 사람에게 밥 먹을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이분들과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분들과 아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다.
도시농업을 배우면서 느낀 것은 참 쉽다. 그리고 참 어렵다 이다.
도시 농업은 시골에서 처럼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삽질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할 넓은 공간도 없다.
그냥 농산물이나 수산물 시장에서 스트로 폼 박스 몇 개 구해서 흙 채워 넣고 유기농종자 구해서 심는다.
그 뒤 햋 볕 잘 드는 곳에 놔두고 아침저녁으로 살펴주면 저절로 알아서 자란다.
그래서 참 어렵다.
일단 흙. 어디서 어떤 흙을 구해 올 것인가?
예전 텔레비전에서 베란다와 옥상에서 상추, 토마도 심어 먹는 거 보고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그쳤는데 가장 큰 이유가 흙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가 있으면 시골에서 밭 흙을 가지고 오면 되는데 나는 차가 없다.
물론 돈을 주면 친절배달 서비스가 된다.
당시 도시 농업에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돈으로 흙을 사서 토마토와 상추 키워 먹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또 손도 많이 갈 것 같았고, 그냥 귀찮았다.
그런 나에게 하늘에서 흙 벼락이 내려졌다.


이 맘 때 쯤 아는 건축업자 분이 조경사업을 하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 분에게 연락을 하자 마침 사흘 후 조경사업이 끝나는 날인데 흙이 좀 남을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흙 좀 가져 갈 수 없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흙 처분하는 길에 가져 다 주겠다고 하셨다.
이때 나는 몇 분들과 함께 이 도시 농업을 하기로 한 상태였다.
이 분들이 피크오일을 콕 찝어서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래 전부터 옥상 텃밭을 해볼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 이야기가 그 계기가 된 것이다.
어떤 분은 나보다 더 많은 걸 알고 계셨고 더 의욕적으로 앞에 서셨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이 일을 진행하면서 많은 분들이 집에서 작은 텃밭이라고 일구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과거의 나처럼 그냥 알고만 있었던 것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잊고 살았던 것이다. 희망이 있었다.
옥상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분이 건물주와 이야기하기로 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아 되어 사흘 후 흙이 도착했다.
오후에 왔는데 덤프트럭으로 한차 분이었다.
우리 몇이서 처리하기에는 불감당한 분량이었다.
마음속으로는 다 내려 주세요 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작게 시작해야 했다.
감당할 수 없는 흙과 돈은 짐이 될 뿐이었다.

흙이 쌓여 갈수록 나의 기쁨과 희망도 쌓여갔다.
밤이 시작되었지만 그건 휴식과 희망이 밤이었다.
이 삭막한 도시에 숨을 쉴 수 있는 작은 녹지공간이 생겨났다는 기쁨이 힘듬을 잊게 했다.
물론 지금은 흙 뿐이지만 흙이 생긴 이상 나머지는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 뿐이다.

첫 단추가 쉽게 끼워 진 것 같아 기쁘고 행복했다.
이대로 플랜 B를 밀고 나간다면 어렵지만 작지 않은 성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건물 주인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여보세요. 재용님이시죠?”
“네 전데요.”
“지금 황토방 지으시나요?”
“황토방요? 아뇨.”
“제 친구가 건물 앞을 지나다가 황토를 엄청 올리는 걸 봤다면서 황토방 만드는 거 아니냐고 제게 전화를 했거든요.”
“아 네 옥상에 작은 농장을 만들어 보려구요.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옥상에 정원이나 농장을 만들면 건물 냉 난방비가 10% 이상 절약이 되거든요.”
“아 전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흙 내리세요.”
“아니 저 말씀 못 들으셨나요?”
“무슨 말이요? 아무튼 지금 여기 지방인데 이틀 뒤에 올라가요. 그 전까지 다 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건물주인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옥상에 쌓여 있는 흙더미를 바라보았다.
황금이 손에서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고 해도 이렇게 가슴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주인에게 왜 이야기가 안 되었지. 어떻게 된 일인지 주인과 연락을 맡았던 제영님과 이야기를 해보았다.
전에 다른 분들도 건물 옥상에 텃밭을 만들려고 했는데
주인이 반대를 해서 못 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꾸며놓고, 우리가 정말 잘 꾸며 놓고 관리를 잘하고 있으면 이야기가 쉬울 것 같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틀 뒤 주인이 오면 만나서 잘 이야기 해보기로 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지금 이 옥상 농장을 잘 꾸며 놓으면 최소한 한 가구가 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명이 목숨을 부지 할 수 있는 땅이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한 들 누가 알아 들을 것인가.
그때가 오기 전에는.
건물주인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그리고 문자가 한 통 띡 하니 왔다.
<옥상에 올라가 봤습니다. 안되니까 다 내려 주세요.>
우리하고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니까 옥상에 올라갔다가 상황만 보고 안 들르고 내려간 것이다.
제영님이 급히 전화통화를 했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쉰다.
“안된대요?”
“말이 안 통해. 그리고 만날 필요가 없다는 거야. 건물이 오래 돼서 옥상농장을 하면 무리가 갈 수 있다는 거야.”
“그건 우리가 잘 이야기 해보면 안 될까요? 꼭 필요한 건데.”
우리에게도 건물 주인에게도, 아니 나중이 되면 건물 주인에게 더욱 절실한 곳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한다고 한들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을 게 분명했다.
“무조건 안 되니까 흙을 내리라는 거야.”
“그럼 어쩌지.”
다른 분이 웃으며 말한다.
“그러게 주인하고 먼저 이야기 했어야 했다니까요.”
“그랬으면 아예 시작도 못했어. 일단 흙을 올렸으니까 배째라 해볼까?”
“배째라요?”
“뭐 최악의 경우 나가라고 하기 밖에 더하겠어.”
“아니 일을 그렇게 진행하면 안 되죠. 다시 전화해서 잘 이야기 해 보는 게 어떨까요?”
“말이 안 통한다니까.”
“그럼 일단 작게라도 한 번 해보겠다고 하는 게 어떨까요?
흙은 올렸으니까 스티로폼 상자로 한 10개 정도 시범삼아 해본다고.”
“열개?”
“열개라야 뭐 귀퉁이 약간 인데.”
제영님이 다시 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세 개에서 열 개를 오가다가 일곱 개에 낙찰이 되었다.
밤새 올렸던 흙은 다음날 다시 내리기로 했다.
“삽질 제대로 했네요.”
“그래도 덕분에 일곱 상자는 하잖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요.”
우리는 한바탕 웃음으로 그날의 삽질을 날려 버렸다.
한가구가 연명할 수 있는 터전이 상자 일곱 개로 줄어들었지만 함께 도시 농업을 할 사람은 남았으니
첫 출발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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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이 대문에 올라간 것을 보고 눈이 멍멍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감사드리고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0-10-08 20:27:47 토론에서 이동 됨]